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잊혀지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기를 원하는 날이 있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프로포즈를 받았던 날과 같이, 결혼기념일과 같이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며 살고 싶은 날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날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처음 교회에 출석하게 된 날이라든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의 기쁨과 감격에 빠졌던 날이라든지, 성령을 체험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던 이런 날들은 정말 잊고 싶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날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잊혀지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날들을 절기로 구별하여 지켜왔는데 그 절기 중에 하나가 바로 바로 부림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그 부림절에 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부림절이란?
그러면 부림절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아각 사람 하만에게서 구원하여 내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이라면 아각 사람 하만에게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부림절입니다. 그런데 부림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만과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 사람을 모르면 부림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림절의 역사적 배경
아하수에로 왕이 페르시아를 통치하고 있을 때 하만이라는 사람이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원래 하만은 평범한 관리로 들어왔으나 왕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여 나중에는 페르시아의 제2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나오면 모든 신하들이 다 엎드려 절을 하고 백성들이 허리를 굽혔습니다.
그런데 하만이 왕궁 문에 출입해도 뻣뻣이 서서 허리를 굽히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바로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으로서 포로로 끌려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왕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만이 들어오고 나아갈 때 엎드려 절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직업적으로도 문지기이고 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았을까요?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경배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만이 요구했던 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엎드려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경배를 요구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어떤 대상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절하는 행위는 단순한 예의 표현이 아니라 신적 경배의 표현이었습니다.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데 어떻게 인간을 경배합니까? 그래서 모르드개는 엎드려 절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하만이 영적인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아각의 후손이었습니다. 아각은 사무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아말렉 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만은 아말렉의 후손이고 모르드개는 유대인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아말렉과 유대인은 철천지원수입니다. 신25:18-19절을 보겠습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신25:18-1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로 아말렉이 너희에게 행한 일을 잊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난 이후에도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6절에도 보면??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말렉과 싸우는 사울에게 어린 아이는 물론 소와 양까지도 진멸하라고 친히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 보복의 하나님,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말렉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갈 때 그 길을 가로막고 비열하게 피곤하여 행군 대열에 떨어진 자들을 공격했던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연약하여 뒤쳐진 성도들을 공격하는 어둠의 세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말렉은 단순한 한 족속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원수를 상징합니다. 지금도 아말렉과 같은 어둠의 세력들은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의 믿음의 길을 가로막으려고 합니다.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고 믿음의 전진을 방해하고자 하는 세력이 바로 아말렉입니다.
지금도 아말렉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습니까? 피곤하여 대열에서 이탈한 자들입니다. 신앙공동체에서 이탈한 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소속되지 못하고 쉽게 편하게 신앙생활하려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홀로 신앙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영적으로 연약하여 믿음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면 사단의 공격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좀 불편하더라도 언제나 신앙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행진에서 낙오자가 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아말렉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이기 때문에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만의 분노와 첫 번째 조서
이 일을 인하여 하만은 분노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문지기가 그것도 예부터 철천지원수로 여겼던 유대인이 자기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하만은 모르드개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르드개가 속한 유다민족 전체를 몰살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왕국에는 한 7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만은 왕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저희를 멸하소서” (3:8-9절)
그러면서 은 일만 달란트를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자기의 반지를 손에서 빼어 하만에게 주면서 “네 소견에 좋을대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왕의 허락을 받아낸 하만은 정월 13일에 왕의 어인이 찍힌 조서를 전국에 내려 보냈습니다. 그 조서의 내용은 바사제국(페르시아)에 거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잡아 죽이라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에 거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남녀, 노소,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모두 잡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언제입니까? 12월(아달월) 13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날을 잡았는지 아십니까? 하만이 제비를 뽑아서 이 날을 잡은 것입니다.
이제 모든 유대인을 진멸하라는 왕의 칙령이 반포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은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금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누운 자들도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죄도 없이 유대인이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지만 머지않아 죽는 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은 얼마 있으면 자신이 죽는 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마냥 재롱을 피우며 뛰어 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사실 그들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만에게 속한 일당들은 유대인들을 볼 때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내 손에 죽어질 사람이라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죽어야 할 사람이기에 얼굴을 들고 거리를 거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노와 슬픔과 비통 속에서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채 죽음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역전의 은혜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왕이 어인이 찍힌 또 하나의 조서가 전국 127도에 반포되었습니다. 또 다른 왕의 칙령이 반포된 것입니다. 두 번째 조서의 내용은 유대인이 멸절당하기로 정하여진 그 날 12월 13일에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던 모든 자들을 도륙하고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으라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유대민족을 진멸하려는 하만의 음모가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에 의해 들통이 났기 때문입니다. 왕은 왕후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하여 하만의 음모를 깨달은 다음 모르드개를 잡아 죽이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높은 나무에 하만을 매달아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만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왕후 에스더에게 주었고 모르드개는 예전에 왕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었음이 밝혀져 하만을 대신하여 페르시아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두 번째 조서의 내용을 따라 자기들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에스더 9:16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들을 잡아 죽였는데 무려 7만 5천명을 잡아 죽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살 위기에 처해 있던 자들이 신분을 보장받게 되었고 유다인들의 위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서 8장 16절과 17절을 보면 부림절에 유다인에게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고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주민등록을 하는데??나도 민족을 유다인으로 바꿔 기재해 주시오??이렇게 민족을 정정하거나, 유다인들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대역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달월(12월) 13일에 원수를 갚고 다음날인 14일에 쉬며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수도인 수산성에 거한 유대인들은 12월 13일 그날에 원수를 다 갚을 수 없어 왕으로부터 하루를 더 연장 받아 12월 13일과 14일 양 이틀에 걸쳐 원수를 멸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대역전의 은총을 허락하신 이 날을 기념하여 12월 14일과 15일을 부림절로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21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 사일과 십 오일을 지키라”(21절)
부림이라는 말은 ‘부르’에서 왔는데 부르는 ‘제비’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을 괴롭히는 하만 일당이 ‘언제 유다인들을 몰살할까?’ 정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는데 이스라엘 달력으로 마지막 달인 아달월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원수를 갚을 때 13일 하루만이 아니라 13일과 14일 양일간 원수를 되갚았기 때문에 부르의 복수형인 부림을 써서 부림절 ‘제비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부림절은 어떤 날입니까? 2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22절a)
부림절은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함을 얻은 날입니다.
부림절은 모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날입니다.
부림절은 애통이 변하여 찬송이 되는 날입니다.
부림절은 초상날이 잔칫날로 바뀐 날입니다.
부림절은 초상집이 변하여 잔칫집이 된 날입니다.
부림절은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된 날입니다.
부림절은 굵은 베옷을 벗고 기쁨의 옷을 입게 된 날입니다.
부림절은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된 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된 것도 역전의 은혜였고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 갔던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도 역시 역전의 은혜였습니다. 대적들은 다니엘을 죽이기 위하여 사자 굴속에 던졌지만 하나님은 다니엘을 살리시고 그 대적들을 사자의 밥이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도 놀라운 역전의 은혜였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 값을 지불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우리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고 대적하고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의 목전에서 보란 듯이 내게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그것을 너무나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그토록 자기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 사울의 목전에서 다윗을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운동경기에만 역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역전의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수많은 역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들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갖게 되는 새생명 축제는 그야말로 역전의 은총을 경험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역전의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역전의 은총을 사모하십시오.
새 생명축제는 오늘 우리의 부림절
우리는 다음 주일 23일과 24일 월요일에 4번에 걸쳐 새생명 축제를 갖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는 새생명축제는 부림절과 같습니다. 부림절의 영광이 임하기 전까지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림절의 영광을 보기 전까지 그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짖누르고 있었습니다. 12월 13일이면 죽어야 되는 그들에게 무슨 자유함이 있고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존재의 이유도 삶의 의미도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예수를 알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부림절의 영광이 임하였습니다. 새로운 칙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의 법에 매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실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대적을 이길 만한 힘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왕의 어인이 찍힌 칙령 때문에 원수를 물리치고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을 얻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림절입니다.
저는 다음 주에 갖게 되는 새생명 축제가 바로 이런 부림절이 될 줄을 믿습니다. 그동안 기도하며 품었던 영혼들을 초청하십시오. 지금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십시오. 그들의 영혼들이 그 날에 주께로 나아와 이런 부림절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역전의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복음을 들음으로 새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원수 마귀로부터, 죄와 질병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예수를 내가 이제 믿게 되었느냐며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그들의 영혼이 기뻐 뛰며 노래할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영혼들이 산 소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 내가 살아야 되는지 삶의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들이 머지않아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으며 예수 안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
부림절의 영광을 보려면
부림절의 영광을 보고 역전의 은총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유대인을 진멸하라는 첫 번째 조서가 내려졌을 때 유대인들은 애통하며 곡읍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4:3)
4:16절을 보면 에스더는 수산성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모여 자신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시녀들과 더불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역자들과 순장님들은 새생명 축제를 앞두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금식기도가 중요한지 아십니까? 금식기도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모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여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58:6)
시편 91:15을 보면 하나님은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기도할 때에 모든 환난에서 구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91:5)
부림절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그 날의 기쁨은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부림절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역전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둘째로,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에스더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에스더는 왕후이기 때문에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죽지 않고 왕의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3일간 금식한 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청원하여 몇 차례의 잔치를 준비하였습니다. 자기의 출세나 자기의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 가운데 처하여 있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에스더의 희생이 없었다면 부림절의 영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놀라운 역전의 축복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내가 열심히 기도했으니까 이제 왕이 나를 부르겠지!??하고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에이, 이만큼 기도했으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하고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에스더는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된 것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히시고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와 희생이 없이는 부림절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기도와 희생이 없이는 역전의 은총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김은호 목사-오륜교회)